사서오경
|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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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경전으로,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와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
[편집] 사서
송나라에 이르러 성리학 체계가 성립하면서 주희가 《예기》에서 일부를 〈대학〉과 〈중용〉의 두 편으로 발췌하면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 체계를 확립했다.
[편집] 오경
악경(樂經)을 포함하여 육경이라고도 하는데,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편집] 바깥 고리
- 孟子全文 (中文)
............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듯한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편집] 구성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편집] 역사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 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이는데,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편집] 내용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 상론(上論) | 하론(下論) |
|---|---|
| 제1편 학이(學而) | 제11편 선진(先進) |
| 제2편 위정(爲政) | 제12편 안연(顔淵) |
| 제3편 팔일(八佾) | 제13편 자로(子路) |
| 제4편 이인(里仁) | 제14편 헌문(憲問) |
| 제5편 공야장(公冶長) | 제15편 위령공(衛靈公) |
| 제6편 옹야(壅也) | 제16편 계씨(季氏) |
| 제7편 술이(術而) | 제17편 양화(陽貨) |
| 제8편 태백(泰佰) | 제18편 미자(微子) |
| 제9편 자한(子罕) | 제19편 자장(子張) |
| 제10편 향당(鄕黨) | 제20편 요왈(堯曰) |
이중 대표적인 학이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 “ |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 |
[편집] 주석서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의 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이토 진사이와 같은 일본 유학자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편집] 영향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써 웨일리와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암 에드워드 수틸이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몬 레이즈는 이 기록이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편집] 바깥 고리
- 論語全文 (中文)
- 울산대학교 중문과 박삼수 교수 공개강의 :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지혜 1,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지혜 2
[편집] 소개
우리 조상들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에 살더라도 어른이 되면 공자님 말씀, 맹자님 말씀을 예로 들며 자식들을 훈계해 왔다. 그 맹자가 정계를 은퇴한 뒤 말년에 쓴 책이 바로 ≪맹자≫다. 맹자는 공자에 비견되기도 하고, ≪맹자≫는 ≪논어≫의 체제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렇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공자가 살아생전인 춘추시대에 벌써 수많은 나라에서 크게 명성을 얻은 탁월한 사상가였음에 비해 맹자는 전국시대의 뛰어난 여러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공자의 말이 ≪맹자≫에 벌써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인용되었던 데 비해, ≪맹자≫는 한나라 때 잠깐 유행하고 1000년이 흐른 뒤인 송나라 때 와서야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정치적·사회적 이념으로 전면 수용한 유학은 송나라 대 이후의 것이므로 우리의 전통 속에서 맹자는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맹자≫는 사후에나 붙이는 시호가 보인다거나 맹자의 행동거지 등을 추측할 어떤 구절도 없는 등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맹자가 말년에 제자들과 더불어 만든 책이라고 추측한다. 비록 사건별, 주장들의 난립 형식으로 구성되긴 했지만 책 전체를 볼 때에는 일관된 사유 체계를 읽을 수 있으며, 주장들 사이에 깊은 연관성과 구체성을 띠고 있다. 또한 격동의 정치 상황 속에서 ‘인의의 정치’로 시대 정치의 난맥상을 타개하려는 정치사상 교과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저작이다.
[편집] 구성
[편집] 양혜왕
맹자가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부분으로 상편은 7장, 하편은 16장으로 되었다. 그는 양혜왕에게 왕도정치를 실시하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왕은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그 즐거움이 오래갈 수 있으며, 왕이라도 잘못하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집] 공손추
맹자는 그의 제자인 공손추와 왕도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패도정치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가의 의리(義理)를 밝히고 자신의 포부를 나타내었다. 상편은 9장, 하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제기(反求諸己), 호연지기(浩然之氣), 인화(人和)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편집] 등문공
왕의 국가통치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상편은 5장, 하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 중국 전대륙을 통치하는 천자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백성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인륜이 가장 중요하니 이를 저버리면 아무리 훌륭한 행실을 해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편집] 이루
상편 28장, 하편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맹자는 자신을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편집] 만장
상하 편 각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장은 덕이 천도에 합치하면 도를 얻을 것이고, 어질면 천하사람을 얻을 것이라며 인도(仁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의가 천의라는 사상과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편집] 고자
맹자와 고자가 인성(人性)에 대하여 대화를 한다. 인의(仁義)는 내적인 것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상편은 20장, 하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차히 살지말고 의로운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왕도가 쇠퇴하는 것은 제후나 대부가 도를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고, 왕이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고 이용만 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편집] 진심
백성이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학문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상편 46장, 하편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에 앞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군자로서 더 추구해야할 것이며,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에 순서가 있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제자백가와 그 계승자 | |||||
|---|---|---|---|---|---|
| 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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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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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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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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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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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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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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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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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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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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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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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이 확립되면서 사서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편집] 전승
《대학》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데, 주희는 경문 1장을 증자가 지었고, 전문 10장을 증자의 문인이 해설했다고 주장하였다. 경문은 성인이 직접 언급한 진리이며, 전문은 성인에 버금가는 현인이 경을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로 경문과 전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삼강령을 밝힌 부분을 경문으로, 팔조목을 밝힌 부분을 전문으로 보았다. 주희는 사서체제를 정립하면서 공자(논어) -> 증자 -> 자사(중용) -> 맹자(맹자)의 도통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대학을 증자의 저서라 하진 못하더라도 증자와 관계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주희가 정이의 설을 따라 3강령 중 ‘親民’을 ‘新民’으로 고치고, 본래 있던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조 앞에 격물과 치지의 장을 새로 지어 보망(補亡)한 8조목을 만든 이래, 송대 성리학을 존숭하는 이들과 고본 《대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왕수인은 ‘친민’이 옳다고 하여 고본 《대학》을 따랐으니,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주희는 사서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읽으라 할 정도로 대학을 중요시했다.
김용옥은 대학을 순자계열의 사상가에 의해 전국시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본다. 저술 목적은 스승의 지위를 확립하여 황제의 권력을 제약하고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으며 집필시기는 여불위가 집대성한 여씨춘추의 집필시기와 일치한다고 보고있다. [1]
[편집] 내용
《대학》은 자기 수양을 완성하고 사회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학’(大學)이라는 의미는 통치자의 학문이라는 설과 인격자의 학문이라는 설로 나눌 수 있다. 주자는 《대학》이 소학(小學)을 마치고 태학(太學)에 입하하여 처음 배우는 개설서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학교의 기본 교양 교재와 같은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은 유가 사상의 주요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자신을 수양한 후에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즉 사회의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한 후에 이를 주변 사회로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삼강령과 팔조목에 담아 내었다.
[편집] 삼강령
- 명명덕(明明德) : 자신의 밝은 덕을 밝게 드러내야 한다.
- 신민(新民) : 자신의 밝은 덕으로 백성을 새롭게 한다.
- 지어지선(至於至善) : 최선을 다하여 가장 합당하고 적절하게 처신하고 행동한다.
[편집] 팔조목
- 격물(格物) :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찬찬히 따져보는 것
- 치지(致知) : 지식과 지혜가 극치에 이르게 하는 것
- 성의(誠意) : 의지를 성실히 다지는 것
- 정심(正心) : 마음을 바로 잡는 것
- 수신(修身) : 자신을 수양하는 것
- 제가(齊家) :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는 것
- 치국(治國) :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 평천하(平天下) :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것
[편집] 같이 보기
- 소학
- 『존사(尊師)』: 여씨춘추의 맹하기에 수록
- 『학기(學記)』: 예기에 대학과 함께 수록
- 치지재격물론(致知在格物論) : 사마광 저
- 대학고본서(大學古本序), 대학문(大學問) : 왕양명 저
[편집] 바깥 고리
《중용》(中庸)은 사서오경에 속하는 경전 중 하나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본래 예기의 31편이다.
[편집] 전승
주자는 《중용》의 작자가 자사라고 단정했고, 사마천의 사기와 몇몇 서적에도 《중용》의 작자는 자사라고 언급했지만, 청대에 이르러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근래에는 《중용》은 자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졌고 이후 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가 학자들의 보충과 해설이 더해져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주희가 《중용》을 정리하여 《중용장구》를 내어 놓았는데, 그 형식을 33장으로 정리했다.
[편집] 내용
《중용》의 요지는 요순 임금의 천하 통치의 정신이 도통인데, 이 도통의 요체는 중용에 있으므로 이를 터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내재되어 있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었는데, 두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이다. 도덕적 본성이 항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되고 하고 인간적 욕심이 매번 도덕적 본성의 명을 듣게 하는 것이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를 위하여 성(性), 도(道), 교(敎)라는 개념으로 천도와 인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은 하늘이 준 사람속에 있는 하늘의 속성이다. 도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효도와 자식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도이다. 교는 도를 마름질하는 것인데, 도를 구체화한 교훈, 예절, 법칙, 제도 등으로 구체화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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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시경》은 전한시대에 〈제시(齊詩)〉·〈노시(魯詩)〉·〈한시(韓詩)〉·〈모시(毛詩)〉 라는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그중의 모시뿐이어서 별도로 모시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시(詩)라고만 불리었으며, "시"라는 말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주나라때 편찬되었다 하여 주시(周詩)라고도 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 오경의 하나에 포함되면서 시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편집] 구성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로,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구분된다.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은 조정에서 불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頌)' 40편은 왕조·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의 노래이다.
주(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기원전 770),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 있다. 주실 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11대 선왕(宣王, 재위 기원전 827 ~ 기원전 782) 시대의 노래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경》 중의 옛 부분이다. 주왕조(周王朝) 창업의 모습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것들도 선왕기(宣王期)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조 초기인 문왕·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 된다. 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풍(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으나, '아(雅)' 또는 '송(頌)'에는 천(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이 있다. 또 천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믿고 천을 원망하여 천의 권위의 붕괴를 노래한 것도 많다. 천의 권위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시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주왕조를 뒷받침하고 있던 천(天)의 사상에 대한 무명의 민중이나 지식인의 비판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천(天)은 지정공평(至正公平)하지 못하다는 원성(怨聲)은 바로 주왕조의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비판이다.
[편집] 국풍
| 한자 | 한글 | 번호 | |
|---|---|---|---|
| 01 | 周南 | 주남 | 001-011 |
| 02 | 召南 | 소남 | 012-025 |
| 03 | ?風 | 패풍 | 026-044 |
| 04 | ?風 | 용풍 | 045-054 |
| 05 | 衛風 | 위풍 | 055-064 |
| 06 | 王風 | 왕풍 | 065-074 |
| 07 | 鄭風 | 정풍 | 075-095 |
| 08 | 齊風 | 제풍 | 096-106 |
| 09 | 魏風 | 위풍 | 107-113 |
| 10 | 唐風 | 당풍 | 114-125 |
| 11 | 秦風 | 진풍 | 126-135 |
| 12 | 陳風 | 진풍 | 136-145 |
| 13 | 檜風 | 회풍 | 146-149 |
| 14 | 曹風 | 조풍 | 150-153 |
| 15 | ?風 | 빈풍 | 154-160 |
[편집] 소아
| 한자 | 한글 | 번호 | |
|---|---|---|---|
| 01 | 鹿鳴 之什 | 녹명지습 | 161-170 |
| 02 | 白華 之什 | 백화지습 | 170-175 |
| 03 | ?弓 之什 | 동궁지습 | 175-185 |
| 04 | 祈父 之什 | 기부지습 | 185-195 |
| 05 | 小旻 之什 | 소민지습 | 195-205 |
| 06 | 北山 之什 | 북산지습 | 205-215 |
| 07 | 桑扈 之什 | 상호지습 | 215-225 |
| 08 | 都人士 之什 | 도인사지습 | 225-234 |
[편집] 대아
| 한자 | 한글 | 번호 | |
|---|---|---|---|
| 01 | 文王之什 | 문왕지습 | 235-244 |
| 02 | 生民之什 | 생민지습 | 245-254 |
| 03 | 蕩之什 | 탕지습 | 255-265 |
[편집] 송
| 한자 | 한글 | 번호 | |
|---|---|---|---|
| 01 | 周頌 | 주송 | 266-296 |
| 01a | -?廟之什 | 청묘지습 | 266-275 |
| 01b | -臣工之什 | 신공지습 | 276-285 |
| 01c | -閔予小子之什 | 민여소자지습 | 286-296 |
| 02 | 魯頌 | 노송 | 297-300 |
| 03 | 商頌 | 상송 | 301-305 |
《중용》의 주요 내용은 성(誠), 중용, 중화(中和)이다. 성은 진실무망이고, 중용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평상의 이치다. 중화는 실천적 측면에서 중을 설명한 것이다.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하며, 일어나고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중국의 고대 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주나라의 정치철학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이다.[1]
크게 《우서(虞書)》·《한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 하나라 · 은나라(상나라) ·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 시대에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1] 혹은 상(尙)은 상(上)을 뜻한다고 보아 "상고지서(上古之書, 상고시대의 공문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5경(五經)에 속한다는 뜻에서 《서경(書經)》이라고 불렀다.
《서경》의 판본은 크게 나누어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 신나라(新, 8년 ~ 23년)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 ? ~ 23년)이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2] 현존하는 판본은 《위고문상서》와 《칭화대본 죽간상서》가 있다.
[편집] 개요
《서경》은 요임금(堯, 기원전 2356년? ~ 기원전 2255년?[3])부터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시대까지 요(堯) · 순(舜)의 2제와 우왕(禹王) · 탕왕(湯王) ·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3왕들이 신하에게 당부하는 훈계와 군왕이 백성에게 내린 포고와 명령, 군왕에게 올린 신하의 진언, 전쟁을 앞두고 백성과 장병들에게 한 훈시, 대신들 사이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서경》은 서약(誓約)하는 글인 "서(誓)"와 고시(告示) 또는 포고(布告)하는 글인 "고(誥)"가 주가 되어 있다.[4]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것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4]
- 반경(盤庚): 은나라 시대의 고시문(告示文)을 주나라 사람이 추기한 것
- 목서(牧誓): 주나라 무왕의 서약문(誓約文)
- 낙고(洛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 강고(康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 주고(酒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이들 중 〈목서(牧誓)〉에서 주나라 무왕은 "지금 저 발(發)은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고자 합니다(今豫發 恭行天之罰 · 금예발 공행천지벌)"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경》의 글들은 모두 이와 같이 조상신(祖上神) 혹은 상제(上帝)에 대한 신앙이나 노예 사회에서의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무겁고 엄격한 색조(色調)로 일관되어 있다.[4]
[편집] 성립
《서경》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원본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은 한나라 경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한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나라의 문자)로 씌여진 고본이고, 금문은 구전된 것을 한나라 문제 때 복생(伏生)이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고문상서는 동한 광무제 때 무성편이 서진 말기에 나머지 15편이 전부 없어졌고, 현재는 위고문상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안국의 위고문상서는 동진 원제때 매색(梅?)이라는 사람이 위고문상서를 조정에 바쳐진 후 청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공안국 혹은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현행본 58편 가운데 이르바 '오고'라고 일컫는 대고, 강고, 주고, 소고, 낙고와 금등, 자재, 다사, 다방 등이 서경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성립이 된것으로 주나라 초기의 기록이라고 한다. 오고는 문체가 가장 난해하여 더 고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때 고요모에는 사상적으로 노장철학과 유가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것도 옅보여 고오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5]
[편집] 구성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나라(夏, 기원전 2205년경 ~ 기원전 1766년경)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몰락(기원전 1122년)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32편은 기원전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편집] 가치
《서경》은 중국 역사서의 효시로 후대의 《사기》와 《한서》같은 본격적인 정사는 아니지만 중국 고대사의 원천이 되는 책이다. 서경의 기록 대부분은 사관에 의해 사실적으로 쓰여져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서경은 중국 고대 사상의 뿌리로 유가의 덕치주의, 도가의 무위이치, 묵가의 숭검비명, 법가의 법치주의 등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다. 서경의 내용과 언어 특징은 은주 시대의 갑골 그리고 청동기에 적힌 글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제작연대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6]
[편집] 최근 소식
최근 중국 칭화대 졸업생이 상서 100편이 기록된 죽간을 학교측에 기증했다고 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됐던 유교 경전 상서 100편이 기록된 죽간이 중국의 명문 칭화대학 졸업생 자오웨이궈(趙偉國)가 기증한 2천100개의 죽간에 기록되어 있었다. [7] 이에 대한 1차 연구조사 결과 2천300-2천400년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죽간에 상서 내용 중 100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분서갱유 이전의 서체로 쓰인 이 죽간에는 한나라 때 상서에 정통한 학자를 시켜 재편집케 한 29편의 상서[8]와 실전됐던 70여편의 상서가 기록돼 있다. 우선 진위여부가 주목되지만 상서가 오랜 세월 동양정치의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어떤 내용인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역경(易經)》은 유학(儒學)의 삼경 중 하나로, 세계의 변화에 관한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 일컬어 지고 있다.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쓴 연대는 대략 동주 시대로 추정된다.
[편집] 개요
고대의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의한 점(占)은 그것들을 불에 구웠을 때 생긴 금(線)을 판단의 재료로 하여 길흉을 점쳤다. 한편 서죽을 써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 주대에는 행해졌다. 이러한 점(占)의 말이나 점법의 정신을 해설한 것이 《역경(易經)》이다. 주대의 점서(占書)라고 하는 데서 《주역(周易)》이라고도 호칭한다.
서죽(筮竹)을 조작하여 남은 수가 기수(奇數)일 때는 양(陽) 즉(-), 우수(偶數)일 때는 음(陰) 즉 (--)이라 하여 그것을 세 번 반복하여 괘(卦)의 상(象)을 얻는다. - 이냐 -- 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3회 반복하여 얻어지는 조합(組合)은 여덟 가지가 있다. 이것을 8괘라고 한다. 건(乾, 곤(坤), 진(震), 손(巽) 등이 그것이다. 8괘를 알맞게 둘씩 조합하여 조합의 가능 한계인 64괘를 얻는다. 이 64괘 각자의 설명을 괘사(卦辭)라 하고, - 이나 --을 각각 효(爻)라고 하거니와 이 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효사(爻辭))라고 한다. 이 괘사와 효사를 《역경(易經)》의 경(經)이라고 한다. 경의 해석이나 역(易)의 정신을 표기한 것을 10익(十翼)이라고 한다.
그러한 말들을 신비화시키고 권위를 부여하려고 괘사(卦辭)는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지었고, 효사(爻辭)는 주공단(周公旦)이 지었고 10익(十翼)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니라고 지적된다. 오늘날은 이들이 동주(東周)의 후기에서 전국시대(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편집] 주역의 철학적 요소
[편집] 태극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나 삼라만상을 움직이게 하는 끝없는 우주의 순환 원리로, 이를 인격화하면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집] 음양
태극은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는데, 양은 하늘, 남자, 밝음, 태양, 위, 강함, 정신, 불, 선 등을 나타내고, 음은 땅, 여자, 어두움, 달, 아래, 부드러움, 육체, 물, 악 등을 나타낸다.
[편집] 사상
음과 양은 다시 각각 음과 양으로 나누어 사상이 이루어지며 사상의학도 여기에서 나왔다.
- 태양 - 양으로서 양으로 작용하는 것
- 소음 - 양으로서 음으로 작용하는 것
- 소양 - 음으로서 양으로 작용하는 것
- 태음 - 음으로서 음으로 작용하는 것
[편집] 팔괘
사상이 다시 음과 양으로 나누어 팔괘가 되는데,
천지의 생성원리를 표현하기도 하고 만물의 변화과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 괘 | 이진수 | 이름 | 뜻 | 자연 | 방위 | 가족 | 신체 | |
|---|---|---|---|---|---|---|---|---|
| 1 | ||| (?) | 111 | 건 (乾) | 건실 | 하늘(天) | 북서 | 아버지 | 머리 |
| 2 | ||? (?) | 110 | 태 (兌) | 기쁨 | 연못(澤) | 서 | 삼녀 | 입 |
| 3 | |?| (?) | 101 | 이 (離) | 이별 | 불(火) | 남 | 차녀 | 눈 |
| 4 | |?? (?) | 100 | 진 (震) | 변동 | 번개(雷) | 동 | 장남 | 발 |
| 5 | ?|| (?) | 011 | 손 (巽) | 따름 | 바람(風) | 남동 | 장녀 | 다리 |
| 6 | ?|? (?) | 010 | 감 (坎) | 험난 | 물(水) | 북 | 차남 | 귀 |
| 7 | ??| (?) | 001 | 간 (艮) | 중지 | 산(山) | 북동 | 삼남 | 손 |
| 8 | ??? (?) | 000 | 곤 (坤) | 유순 | 땅(地) | 남서 | 어머니 | 배 |
[편집] 대성괘
팔괘를 서로 겹쳐서 64괘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대성괘라고 하며 주역의 본문을 구성하는 괘이다.
1번 건괘에서 30번 이괘까지를 상경이라고하며, 우주의 선천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한다.
31번 함괘에서 64번 미제괘까지는 하경이라하며, 인간의 후천적인 변화와 순환 과정을 상징한다.
[편집] 주역의 문헌적 요소
[편집] 역전과 역경
주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데, 역전과 역경이 그것이다.
역경은 64괘와 각 괘의 해석을 담고 있고 고대로부터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문서이다. 각 괘의 해석은 다시 7개의 작은 해석들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해석은 괘의 총론에 해당하며, 나머지 여섯개의 해석은 각 효에 따른 해석이다. 여기서 효란 음양을 의미한다. 단 첫 번째와 두 번째 괘인 건과 곤은 이 7개의 작은 해석에서 예외인데, 건과 곤은 각각 하나의 해석을 더 가지고 있어 총 여덟개의 작은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전은 역경의 보조격 문서로 점을 치는 방법, 역경에 대한 주석 등을 담고 있다. 역전은 10개의 소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십익이라고도 부르며, 일반적으로 공자가 주석을 달았다고 여겨진다.
[편집] 해석 방법
주역은 일반적으로 난해하다고 여겨지는데, 역경의 해석문이 은유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은유를 현실적으로 읽는 방법에서 크게 두가지 방법이 흥행했는데, 상수역과 의리역으로 나뉜다.
상수역은 주역이 우주전체의 원리를 포괄한다고 사상에 입각해서 해석하며 해석문보다는 음양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괘의 기호학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의리역은 주역이 군자의 수양에 대한 내용만을 다룬다는 대전제 하에서 괘의 기호학적 해석보다는 해석문의 유교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이 두가지 방법은 여러가지 변형 방법을 낳으면서 발전했는데, 상수역이 의리역의 방법의 일부를 수용하기도 하고 의리역이 상수역의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발전했다.
이 두가지 방법 이외에도 불교나 도교 측에서 각자의 교리에 맞게 해석한 방법들이 발전했다. 하지만 유교의 상수역이나 의리역만큼은 발전하지 못 하였다. 근대에 들어서서 유교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특히 주역의 입지는 더욱 더 좁아들었는데 그 이유는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의리역이나 상수역 같은 고전적인 해석보다는 객관적이고 논증적인 해석방법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역을 상나라의 역사로 보는 방법, 주역은 점쟁이의 공리공론에 불과하다는 입장 등 다양한 방법들이 제기되고 있다.
[편집] 주역 계사전
〈계사전〉은 고대 중국 사회에서 일종의 점서로서 기능을 해온 《주역》이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즉 〈계사전〉은 《주역》의 난해하고 심원한 세계로 이끌어줄 철학적이며 총론적인 성격의 글인 셈이다.
〈계사전〉의 저자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공자가 〈십익〉을 지었다고 하나, 송 대 이후 학자들 간에 그 진위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중에는 〈계사전〉이 전국 말에서 한 초에 걸쳐 여러 학인들의 손을 거쳐 쓰인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계사전〉이 담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에는 방대한 학식과 통찰력이 있다고 주장된다.
〈계사상전〉과 〈계사하전〉으로 나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체용(體用)적 사유에 의거한 것이다. 즉 〈계사상전〉(체)이 형이상적이고 본체론적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면, 〈계사하전〉(용)은 형이하적이며 인사적인 내용을 많이 포괄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원칙적 차원에서의 구분이며, 모든 장의 서술 내용이 전술한 기준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계사전〉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글의 서술 방식이 저자의 특정한 사상적 관점에 입각하여 수미일관하게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계사전〉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역(易)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일견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변화의 도’를 체(體)로 삼는 《주역》의 근본 종지에 위배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된다.
[편집] 문구
- "聖人南面而聽天下,嚮明而治" - (說卦 제5장)
《예기》(禮記)는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로, 예법(禮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이다. 공자(孔子)와 그 후학들이 지은 책들을 한나라의 제후인 헌왕(獻王)이 131편으로 정리하여 엮은 것을 뒷날 유향(劉向)과 대덕(戴德)·대성(戴聖)의 형제들이 잇따라 증보하거나 간추린 것으로 전한다.
한무제 때 하간의 헌왕이 공자(孔子)와 그 후학들이 지은 131편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한 후, 선제 때 유향이 214편으로 엮었고, 대덕이 85편으로, 대성이 49편으로 간추렸다.
중국(中國) 24사(史)의 하나이며, 왕조(王朝)의 제도(制度), 상복(喪服), 동작(動作)의 규칙(規則), 예(禮)의 해설(解說), 예악의 이론(理論) 등을 담고 있다.
원(元)의 순제(順帝) 때 요(遼), 금(金)의 양사(兩史)ㆍ탈탈(脫脫)과 함께 편찬(編纂)되었다.
《춘추》(春秋)는 공자(孔子)가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를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또한 맹자(孟子)는 춘추가 등장한 후에 간신적자들이 떨었다고 할만큼 엄중한 역사의 평가가 담겨있는 대의 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의 관우와 두예(杜預)는 평생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혔다고 하는 책이기도 하다.
[편집] 개요
춘추라는 책이름은 일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필체가 매우 엄중하였으며, 참고로 글자 한자 한자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유교와 중국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어렵다. 모르고 읽으면 지겨울 만큼 간단한 역사기록일 뿐이지만 글자 한자 한자에 담겨진 뜻을 알면 공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에 얼마나 엄중했는지 알 수 있다. 맹자는 춘추가 지어지자 간신적자들이 떨었다고 할만큼 글 한자 한자에 엄중한 역사의 평가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대의 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와 싸울때도 대의명분이 있는 전쟁과 아닌 전쟁을 구별하여 달리 표기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정통성이 있는 왕과 아닌 왕을 구별하였다.
춘추대의라 함은 춘추에서 내린 엄중한 대의명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춘추필법이라 하면 엄중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글쓰기 법이라는 뜻이다.
[편집] 저작 연대
전통적으로 유교에서는 춘추의 저자가 공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시대에 마다 달리 주장하여 한결같지 않다.
최초로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말한 사람은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요(堯)임금으로부터 현재까지의 혼란 했던 역사를 말하고, 주나라의 쇠퇴하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자가 춘추를 만들었고, 그 문장에는 역사가 기록되어있지만, 그 문장에도 공자의 이상인 도리를 나타냈다고 한다.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에도 비슷한 기술이 있어, 공자가 노나라(魯)의 역사서인 원본 춘추에 자신의 글을 첨가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전한시대 춘추학에서는 오로지 춘추에서 공자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하는 공양학이 융성하였다.
신나라를 거처 후한(後漢)이 건국된 이후에 공자를 주공(周公)의 조술자(祖述者)로 하는 고문학이 융성하였고, 춘추좌씨전에 을 그 것을 해석하는 학문이 나타났다. 춘추를 주공의 전통을 계승했던 노나라의 사관이 쓴 노나라의 사기를 그 자체를 보고는 공자는 말하였지만 적지 않았다는 것을 조술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되었다.
당나라 시대가 되자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으로 시작으로 춘추를 의심하는 주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은 춘추의 내용은 공자의 숨은 의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문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공자의 숨겨진 의미를 찾겠다면서 계속되었다.
청나라 시대가 되자 상주학파(常州學派)가 다시 한나라 시대의 공양학을 연구하여 춘추를 포함한 육경을 편집자로서 공자가 창작한 것으로 하였다.
그 후, 근대가 되어서 고사변(古史辯)을 주로 삼는 의고파(擬古派)가 나타나자 공자와 춘추의 관계를 완전하게 부정했다.현재는 공자의 저작이라는 강력한 주장은 없지만 어떠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완전히 관계없다고 하는 것등 두가지 의견이 있다.
[편집] 춘추주석서
춘추는 경문으로 된 단독본이 현존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춘추(춘추경)로 불리고 있는 것은 전국시대부터 전한시대에 걸쳐 제작된 전(傳)이라 불리는 주석서로 불린 책으로 전해진 것들이다. 현존하고 있는 전(주석서)은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등 3개가 있으며, 그 책을 춘추삼전으로 불린다.
이 삼전이 전하는 각각의 춘추에는 약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언급하는 연대도 공양전, 곡량전은 애공 12년까지이고, 춘추좌씨전이 애공 14년까지이다. 어느 전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주장이 달라서 역대 중국 왕조에도 논쟁이 되었다. 초기 논쟁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논쟁이 유명하다.
[편집] 춘추학
춘추는 간결하게 된 연표와 간단하게 된 문체로 쓰여있어 문장에는 특별한 사상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세에 공자의 사상이 본문의 여러가지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되었다(춘추필법). 예를 들면 "송의 자작(송 양공)이 환공의 요청에 응해 회맹하러 왔다."라고 하는 문장이 있다. 그러나 실제는 송나라는 공작의 나라에서 만났다. 이것에 대해서 후세 학자들은 "송 양공은 부친의 상중에 구애받지 않고 회맹에 왔다. 불효라고 생각하고 썼던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춘추로부터 공자의 사상을 읽으려고 하는 춘추학이 일어났다.
전한 무제때에 공양전에 의거하는 춘추학을 내건 동중서가 「춘추」를 법가 사상으로 바뀌는 통치 원리를 나타내는 책이라 주장하였다. 그 후, 오경 박사가 설치되어 공양전, 곡량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고, 신나라는 유흠(劉歆)이 춘추좌씨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다. 후한은 춘추좌씨전은 학관에 세웠지만, 오로지 공양학을 연구를 하였지만, 춘추좌씨전을 복건(服虔)이 훈고학에 근거하여 주석을 만드는 등, 이윽고 공양학을 압도하였다. 이것에 대항하여 공양전에는 하휴(何休)가 주석를 붙여 춘추공양해고를 만들었지만, 서진의 두예(杜預)가 춘추 경문과 춘추좌씨전을 하나로 합쳐서 주석을 달은 춘추경전집해를 만들어, 이후, 춘추학의 기본이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춘추경전집해에 대해서 춘추정의(春秋正義)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 삼전(특히 춘추좌씨전)은 춘추의 주석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되어, 송나라 시대에는 삼전은 배척하고 새로운 주석이 만들어졌다.
| 사서오경(四書五經) | |
|---|---|
| 사서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대학(大學) · 중용(中庸) |
| 오경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역경(易經) · 예기(禮記) · 춘추(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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